4월, 2022의 게시물 표시

앎은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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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용인이 없는 서로에 대한 앎은 폭력이 될 수 있다. 그것이 강한자의 약한자에 대한 앎이라면 그 순간부터 지독한 폭력이 시작된다. 평등한 관계를 좀처럼 찾을 수 없듯이 폭력이 아닌 앎 또한 좀처럼 찾기 어렵다. 다수의 소수에 대한 앎은 물리적인 것보다 더 치명적인 폭력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소돔의 죄악이고 "상관하리라"의 시작이다. 그 예가 낯선 이에 대한 폭력이다. 약자 짓밟기와 폭력은 소돔이 노함을 입은 이유다.   from CBS아카데미숲, 김근주교수를 읽고

주전 8세기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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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시대를 일컫는 팔레스타인 지방의 번영은 다윗 이후 남북시대로의 분열까지 이어졌다. 이후 앗수르의 서진정책으로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남유다가 명맥을 이어갔지만 패권은 이집트까지 앗수르의 지배로 종결되었다. 앗수르가 약해지면서 남유다가 이전 북이스라엘 영토의 일부를 수복하는 듯 회복세를 보였지만 다시 바벨론이 패권을 장악하면서 바벨론 유수가 일어난다 바벨론의 멸망은 페르시아시대로 이어진다. 페르시아시대에서는 그 동안 포로들을 바벨론으로 이송했던 것과는 반대로 각 지로 돌아가 자신의 영역을 영위하는 시대가 되었다. 어찌되었건 이같은 열강들의 등장으로 팔레스타인은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시대에서 세계정세에 따라 운명이 바뀌는 시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위대한 예언자들의 시대고 어려움 속에서 수많은 위대한 예언자들이 활동을 하는 배경이 되었다. from 기독미디어 로고스TV를 읽고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처럼 되었다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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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에는 하나님 처럼 선악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반지식 없이 어렴풋한 상태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경험하지 않은 사실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고 죄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면서 우리는 선과 악을 구분하기를 이전처럼 경험하지 않은 사실이 아니라, 경험한 사실로서 선과 악을 판단할수 있게 된 것이다.  선과 악의 판단하는 기준이 하나님에게만 있었으나 인간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수준에 올랐으을 의미한다고 본다. 하나님은 선과 악의 판단에 대해 그 결정권이 하나님에 있기를 원하셨다. 판단의 기준을 우리가 가져오면서 우리는 판단을 우리에 유리하게 가져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선악의 판단의 기준이 나에게 있다면 그 잣대는 완전함에서 벗어나게될 위험이 커진다. from 기독미디어 로고스TV를 읽고

카인을 죽이려던 자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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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이 하나님께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하는 장면이 있다. 카인은 아담과 하와의 첫번째인데 누가 카인을 죽이게 된다는 것일까? 창세기에선 아담과 하와의 사이에서 세명의 아이가 있던 것이 아닐까? 카인, 아벨, 셋 그런데 카인은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아담과 하와가 900년간 많은 자녀를 낳았고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되었을 것이라는 풀이도 있다. 창세기 1장에서 4장까지는 전하고자 하는 내용만을 명료하게 전달하는 역할이다.  카인이 두려워 하는 것은 범죄한 인간이 가지게 되는 근본적인 공포와 두려움이다. 따라서, 창세기의 저자는 창세기의 논리에 따라 바깥에 사람이 살고 있다 아니다에는 전혀 신경쓰고 있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카인이 세상에 나갈때는 이미 다른 곳에 많은 사람들이 있을 가능성이 있고, 이것을 첫번째 두번째로 맞추어 나가서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도달할 수 없다. 창세기의 설명은 모든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의 명확함이 었으리라 본다.  from 기독미디러 로고스TV를 읽고

얼음틀 - 커다란 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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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얼음을 만들 수 있는 얼음틀이다 고무재질로 되어 있어 얼음을 빼 낼 때는 좌우로 틀어주면 된다 뚜껑이 있어서 완전한 구형의 얼음을 만들수 있고 얼음의 크기는 꽤 큼직해서 한손에 두개 들기가 버거운 정도다. 위스키잔에 하나 넣어 마셔 볼 때다. 술을 입에 안댄지 꽤 된 것 같은데 얼음틀을 보니 예전 홀짝이던 기분이 슬며시 올라온다.